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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의 목소리 – 각각의 피해상황과 전후(戦後)
 
이 곳에 게재한 것은 '위안부' 피해자 여러분으로부터 들은 증언입니다.
 
 증언 1 가네다 키미코 (한국)
 

가네다 키미코(金田君子)씨는 1921년 10월22일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조선인, 어머니는 일본인이었습니다. 태어나자 마자 생모와 헤어져 부친의 고향에 맡겨졌습니다. 부친은 목사가 되었습니다만, 1935년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16살 때, 건너편 일본인 집에서 일하던 여자 아이가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해서 서울로 갔으며, 일본인의 인솔로 기차를 탔습니다. 중국 톈진(天津)에서 베이잔(北站)을 거쳐 짜오창(棗強)에 있는 부대로 보내져 위안부가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가네다 키미코(金田君子)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윽고 조강에서 스쟈좡(石家莊)으로 옮겼습니다.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피기 시작한 아편에 중독된 가네다씨는 1945년 귀국이 허용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가혹한 위안소 생활로 상처 입은 자궁을 적출해야만 했습니다. 가네다씨는 1997년 1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기금의 보상사업과 총리의 서한을 받은 피해자의 한 사람입니다. 2005년 1월27일, 가네다씨는 돌아가셨습니다.

 
 

부친에 대해  

내가 14살 때 아버지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며 경찰에 연행되었다. 나는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 일을 도와 청소도 해야 해서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여유도 없었다.
 14살 때 아버지가 일본 고등경찰에게 잡혀갔다. 아버지는 일본어를 잘 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신도들을 데리고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기 고문을 받은 다리의 화상을 치료하는 동안,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며 경찰이 다시 아버지를 잡으러 새벽 4시쯤에 집으로 왔다. 그 때 아버지는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이를 알리러 달려갔다."아버지 달아나요. 경찰이 또 왔어요." 당시 교회 주변은 논밭으로, 그 건너편에 일본인 마을이 있었다. 아버지는 기도를 멈추고 그 곳을 통해 달아났다. 대구로 가서 경북 성주에 사는 숙모를 찾아가 거기에 숨어 살았다.

중국으로 연행되어

새벽 4시 기차를 타서 산카이칸(山海關)까지 갔다. 두 시간 정도 기차가 멈췄기 때문에 나하고 요시코는 달아나려고 했다. 그런데 출입구에는 헌병이 지키고 있어서, 무서워져서 돌아왔다. 기차 속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틀째 11시쯤 톈진(天津)역에 도착했다. 톈진역에 내리자,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트럭 1대, 마차 1대, 그리고 지프차 1대를 타고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우리들을 마차에 태베이잔의 어느 집에 도착하니까 몇 명인가의 여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가까이에는 일본군대가 있어서 토벌하러 가거나 했는데, 무서웠다. 그 날 10명씩 배치된 우리들은 나츠메쿄우(짜오창)로 가게 됐다. 가 보니까, 성 안에 일본군이 있었고 우리들을 전원 부대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군대식당으로 모이게 했는데 모두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위안부를 강요 당하다

어떤 기분이었냐고? 이제 죽었구나 싶어서 우는 것 밖에 할 게 없었다.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울기만 했다. 부대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부터 그 방에 들어가야 했다. 병사가 방에 들어왔는데 죽어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제일 처음 들어온 병사는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 옷을 벗기려고 잡아 당기길래 안 된다고 했더니 그냥 돌아갔다. 두 번째 들어온 병사는 술에 취한 채 들어왔다. 술에 취해서는 칼을 보이면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래도 죽어도 좋다며 말을 듣지 않자 결국 칼에 찔렸다. 여기를 찔렸다 (가슴을 젖히며 가리킴) 찔리는 순간 나는 뒤로 쓰러졌기 때문에 그 정도 상처로 끝났다. 그 후 병사는 헌병대에 연행되었고 나는 위생실로 옮겨졌다. 입고 있던 옷이 피로 젖어 있었다. 20일 간 위생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오니, 토벌에서 돌아 온 병사가 들어왔다. 20일간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가슴의 상처는 좋아졌지만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또 병사가 덮쳤다. 무서웠지만 시키는 대로 순순히 하지 않자 병사는 내 손목을 꺾고는 방안에서 밖으로 내던졌다. 그래서 손목 뼈가 부러지고 조각조각 났다. 여기가 부러져서 여기에는 뼈가 없다. 지금도 아파서 수술을 하려고 해도 나이가 들어서 못 고친다고 한다. 여기는 군화로 차여서 살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났다. (정강이를 가리킴)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다. 그래서 다리에 힘이 없어 넘어질 것 같고 많이 아프다.

스쟈좡(石家莊)의 위안소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군인들을 상대했다. 15명 이내였다. 토벌에서 돌아왔을 때는 아침 일찍부터 찾아 왔다. 많은 날은 20명 정도였다. 그래서 나중에 자궁을(20대에) 적출하게 되었다. 어린 여자 아이들, 국민학교 5,6학년, 중학교 고등학생 정도의 여자 아이를 데려와도 성기가 작잖아요. 거기가 너덜너덜해져서 균이 들어가고 약이라고는 로쿠로쿠(성병예방약 606호)와 아카진키 밖에 없었다. 그래서 곪아도 치료를 할 수가 없다. 그럴 때는 중국인 노동자에게 방공호에 풀을 잔뜩 깔게 해서 거기에 병자를 넣었다. 이불도 없었다. 밑에는 흙이에요. 군대가 명하는 대로 그 안에 들어가야 했다. 당시에는 전기는 없어서 램프였는데 방공호에는 램프도 없었다. 그래서 컴컴한 어둠 속에서 '엄마 배고파! 엄마 아파!'라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들이 남은 밥을 가지고 가고 싶어도,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도 있었고 몸이 안 좋은 사람, 폐병에 걸린 사람, 그런 사람 밖에 없어서 무서워서 갈 수가 없었다. 등불이라도 있으면 가겠는데, 등불도 없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를 잡고 안 놔주면 어떡하나 해서. 그래서 우리들도 안에 안 들어갔다. 몇 명인가가 죽어 나가자 여자 아이들이 무서워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들 한꺼번에 방공호에 약을 넣고 죽여버리고는 묻어 버렸다. 묻은 다음에 그 옆에 새로운 방공호를 파서 또 병자가 생기면 거기에 넣었다.

죽어가는 군인들

군인들도 한 달에 몇 백 명이 부상을 입고 돌아오거나, 죽어서 부대로 돌아왔다. 운동장에 판자를 깔고 천막을 치고, 거기에 죽은 군인들, 다친 군인을 눕혔다. 군인들은 '아프다'며 신음했다. 살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물을 주지 않고 알코올을 묻힌 솜으로 입가를 닦아주고, 모르핀 주사가 있어서 그걸 놔 주면 잠이 들었다. 중상자에게는 두 번 주사를 놓았다. 모르핀을 놔 주면 아프다고 끙끙거리지 않고 잠이 들었다. 나중에 약기운이 떨어지면 내 옷을 붙잡고, 평소에는 가네다 키미코라 하지만 그 때는 '네에상(누나를 부르는 말)'이라고 했다. '네에상, 한 번만 더 부탁해'라고. 불쌍해서 또 봐 주면 또 잔다. 그리고 죽어갈을 때 '천황폐하 만세'라며 죽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자기 엄마나, 부인, 아이 사진을 보면서 '어머니, 저는 죽을 지도 모르지만, 죽으면 야스쿠니(靖国) 신사에서 만나요.'라고 말하며 울었다. 그러면 나도 덩달아 울었다. (영상은 여기)
 그래서 야스쿠니 신사가 얼마나 좋은 곳일까 생각했다. 야스쿠니 신사의 꽃나무 아래에 간다고 하길래 가 봤더니 아무것도 없었다. 흰 비둘기 밖에 없었다. 나는 거기에 앉아서 아무 말 없이 생각했다. 군인들은 옛날에 자기가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 꽃나무 아래에 간다고 했는데 그 한이 흰 비둘기가 되어 여기에 있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아파서 자판기에서 산 먹이를 주었더니 비둘기가 내 손에 앉아서 먹이를 먹었다.

  1998년 기금 제작 비디오로부터  

 증언 2 마리아 로사 헨손(필리핀)
 

로사 헨손(Rosa Henson)씨는 1927년 12월5일 마닐라 근교의 파사이(Pasay)에서 태어났습니다. 대지주인 아버지와 가정부였던 어머니 사이의 사생아였습니다. 14살 생일 3일 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고, 필리핀은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1942년 2월, 그녀는 집에서 쓸 땔감을 주우러 숙부와 이웃 사람들과 함께 나갔다가 그 때 두 명의 일본군인과 장교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2 주 후에도 같은 장교로부터 강간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에서 일본군에게 심한 분노를 느껴 그녀는 항일 인민군 후크발라합(Hukbalahap)에 참가하였습니다. 1년후 1943년 4월 앙헬레스(Angeles)시 교외의 검문소를 통과하려다 체포되어 일본군 사령부에 끌려가, 그대로 감금되어 계속적으로 강간을 당하게 됩니다. 헨손씨는 그 때 16살이었습니다. 헨손 씨는 9개월간 이런 생활을 보낸 끝에 1994년 1월 게릴라군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일본이 항복한 후 그녀는 필리핀군 병사였던 사람과 결혼하였습니다. 딸을 둘 났고 나서, 남편은 공산군에 참가하여 사망하였습니다. 그녀는 세탁부와 담배공장 노동자로 일하였습니다. 1992년 그녀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위안부' 였음을 밝혔습니다. 필리핀에서 제일 먼저 밝힌 분입니다. 1996년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3명 중 1명입니다. 로사 헨손씨는 1997년 8월18일에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들이 병영으로 삼고 있던 병원에 머물도록 강요당했다. 2,3일 동안 그 병영에서 6명의 여성과 만났다. 일본병사는 내게 동료 병사 몇 명을 상대로 성관계를 시켰다. 어떨 때는 병사 12명을 상대할 것을 강요 당했고, 그리고 잠시 쉬고 난 후 또 12명 정도를 상대할 것을 강요 당했다.

휴식은 없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내게 성관계를 강요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쳐서  녹초가 됐다. 병사들 모두가 만족할 때까지 쉬게 해 주지 않았다. 아마도 병영에 있던 여성은 일곱 명이었으니까 일인당 수를 생각하면 병사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소녀였고, 이 경험은 고통 그 자체였다. 나는 거기에 3개월 있었고, 그 후 같은 앙헬레스에 있는 정미소로 이송되었다. 우리가 이동한다는 말을 들은 것은 밤이 돼서였다. 정미소에 도착하자 같은 일이 시작되었다. 때로는 아침부터, 때로는 저녁부터, 20번 이상이나 당하는 날도 있었다. 때로는 우리들을 일본인 거주지로 데려가는 일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판민투안(Pamintuan) 역사박물관이다. 거기에는 몇 번인가 가야 했었는데 싫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분명히 죽였을 것이다. 아침에는 경비병이 있었다. 우리는 병영 내를 돌아다닐 수 있었으나 외출은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같이 있던 여성들과 이야기 하는 것조차 못했다. 그 중 2명은 중국인이었던 것 같다. 그 외 사람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팡팡가(Pampanga)에서 끌려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때는 우리들이 서로 이야기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리라 필리피나 피해자 증언 요지, 마리나 로사 헨손, 69세, 팡팡가주 거주'
(1992년9월 작성)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일본인에 대해 분노를 느끼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마도 신앙이 구원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 왔다. 동시에 용서하는 것도 배웠다.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었기에, 나도 또한 나를 능욕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나의 울분도 그 옛날 그대로이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말함으로써 과거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죽기 전에 보고 싶다. (영상은 여기)

    자전 Maria Rosa L.Henson, Comfort Women,Slave of Destiny,1996로 부터  


 증언 3 어느 대만인 피해자
 
이 분은 1930년 대만 먀오리(苗栗)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대만내 일본군 시설로 끌려가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50년이 지나 처음으로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연금사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 제 약혼자는 일본 병사에게 잡혀가 남쪽으로 갔습니다. 저는 집에서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일본인 경찰이 부르러 와서 일이 있으니까 오라고 했습니다. 부대에서 밥을 짓거나 헤진 옷을 수선하는 일이라고. 가고 싶지 않았지만, 경찰이 지금은 전쟁으로 남자도 여자도 모두 국가총동원법이 발령되어 있으므로 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일하러 가기로 했습니다. 일본병사가 잔뜩 있었습니다. 저 외에도 몇 명인가 여자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밥을 지어서 병사들을 먹이고 그리고 빨래를 하고 헤진 옷을 기웠습니다. 그랬더니 밤이 되자 방에 불려 들어가게 해서…, 나쁜 일이었습니다.

울기만 했습니다. 낮에는 옷을 깁고, 빨래를 하고, 그 일은 편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녁은 죽음이었습니다. 죽은 상태였어요. 죽어 있는 기분이었죠. 도망치고 싶어도 길을 몰랐습니다.

게다가 문 쪽에는 병사가 서 있어서 도망친다면 총을 맞았을 겁니다 아이였거든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임신한 것도 몰랐어요. 밥을 먹어도 토하니까 같이 있던 여자가 임신한 거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2개월 후 유산했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나옵니다. 아…,당신한테 이런 안 좋은 얘기를 해서 미안하네요.

약혼자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쟁 후 한참 있다가 돌연히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결혼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남편한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1996년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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