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념관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 여성 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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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의 위안소와 위안부 >위안소의 생활
 
 위안소의 생활

위안소에서 여성들은 많은 장병에게 성적인 봉사를 하도록 강요 당하였으며 인간으로서 존엄을 짓밟혔습니다. 위안소의 영업 시간은 아침 9시내지 10시부터 밤늦게까지 긴시간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병사를 상대로 저녁 6시까지, 그 후에 하사관을 상대로 7시부터 9시까지, 그 외에 장교를 상대하는 것으로 정해진 곳도 있었습니다.

 
   
(上)위안소의 앞에 순번을 기다리는 병사들(사진 위)
(右) 제 6 위안소 사쿠라누(사진 오른쪽)
무라세 모리야스(村瀬守保) 사진집 "나의 종군 중국전선"에서
 

통상 위안소의 경우는 병사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대금을 지불하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것은 경영자와 여성 사이에서 절반씩 나누어 갖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만 위안부였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휴일은 한달에 1번, 예외적인 경우에는 2번이었고, 무휴로 운영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외출도 군의 허가가 필요하였습니다.

미군의 포로 심문 기록에는 버마, 미치나(Myitkyina)의 조선인 경영의 위안소의 경우, 외출은 자유이며 스포츠나 피크닉에 참가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만, 미군의 조사에 대한 진술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의 상황이 악화되면 동시에 생활의 비참함도 그 도를 넘었습니다.

전지에서는 항상 군과 함께 행동하게 되어 있어 전혀 자유가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일본군이 동남아시아에서 패하기 시작하면서 위안소의 여성들은 현지에 버려지거나 패주하는 군과 운명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병사와 함께 자살한 사람도 있으며, 겨우 탈출하여 연합군에 보호된 사람도 있습니다. 운남에서 보호된 조선인 위안부들 1944년9월3일(미국국립문서관)

1945년(쇼와 20년)8월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위안부들은 쉽게 귀국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 가운에는 자신이 처한 처지를 부끄러워하여 귀국못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 있습니다. 귀국을 포기한 사람들은 타향을 떠돌며 거기에서 생을 마감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끌려온 위안부들 가운데 중국에 머무르던 사람들이 1990년대가 되어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모국으로 돌아온 피해자들도 편안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상처받은 육체와 잔혹한 과거의 기억을 안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많은 분들이 결혼도 못하고 자신의 아이를 낳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이 생기더라도 자신의 과거를 감춰야 하며 마음속 고통을 다른 이에게 호소할 수 없는 것이 이들의 몸과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였습니다. 군 위안소에서 지낸 수년간의 고통에 못지 않은 아픔 속에서 이들은 전후 반세기를 살아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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